꿈을 꾸다 잠에서 깼는데 허리가 욱신거린 경험, 한 번쯤 있지 않습니까. 저는 얼마 전 그 경험을 아주 생생하게 했습니다. 그 순간 문득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몸은 내가 인식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는 것 아닐까. 그 생각이 이 글의 시작입니다.

뇌가 아니라 세포가 기억한다, 연구가 말하는 것
2024년 11월, 뉴욕대학교 연구팀이 발표한 실험 결과는 꽤 당혹스럽습니다. 연구팀은 뇌세포가 아닌 신장 세포와 피부 세포에 화학적 자극을 줬습니다. 한 그룹은 자극을 한 번에 몰아서, 다른 그룹은 네 번에 나눠 간격을 두고 반복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두 그룹 모두 자극을 기억했는데, 나눠서 받은 그룹이 더 강하고 오래 지속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뇌 없이도 세포 수준에서 학습과 기억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2025년에는 국제 학술지 PNAS에 더 직접적인 근거가 실렸습니다. 연구진이 근막 세포인 섬유아세포(fibroblast)에 일정한 당김을 가했더니, 자극이 멈춘 뒤에도 세포들은 활성화된 상태를 한참 동안 유지했습니다. 여기서 섬유아세포란 근막 조직을 구성하는 핵심 세포로, 콜라겐을 생성하고 조직의 장력을 유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세포가 외부 압력의 패턴을 저장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번 실험의 핵심입니다.
저는 이 결과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꿈속에서 얼음이 가득 찬 자루가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붙잡는 꿈을 꿨는데, 일어나 보니 허리가 제대로 뭉쳐 있었습니다. 꿈속 긴장이 실제 근육 수축으로 이어진 겁니다. 그냥 잠을 설쳤겠지 하고 넘길 수도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너무 선명했습니다.
이 현상의 중심에 있는 구조가 바로 근막(fascia)입니다. 근막이란 근육, 뼈, 장기, 신경, 혈관을 모두 감싸고 연결하는 결합 조직의 그물망입니다. 이탈리아의 근막 연구자 파울로 스테코 박사는 2014년 논문에서 근막이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방식을 여섯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 신경망 패턴: 근막 주변 신경들이 특정 자극 패턴을 반복적으로 유지
- 콜라겐 변형: 근막을 구성하는 콜라겐이 특정 형태로 굳으면서 기억 패턴 형성
- 후성 유전적 기억: 근막 세포 내 유전자가 자극에 따라 켜지고 꺼지는 방식으로 정보 저장
- 세포 진동 패턴: 세포의 미세한 진동 자체가 고유한 패턴을 가짐
- 화학적 기억: 근막 속 신경 전달 물질과 염증 물질이 기억 패턴을 형성
- 텐서그리티(tensegrity) 기억: 근막 전체의 장력 분포 패턴이 기억 유지에 관여. 여기서 텐서그리티란 구조물이 압축과 인장의 균형으로 형태를 유지하는 원리를 말하며, 근막 전체가 하나의 연속된 장력 네트워크라는 개념입니다.
근막이 단순한 포장재가 아니라 정교한 감각 기관이라는 주장이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출처: 국립중앙의학도서관 PubMed).
트라우마는 마음만이 아니라 몸에 새겨진다
하버드 의대 정신과 교수 베셀 반 데어 콜크는 1994년 논문 'The Body Keeps the Score'에서 중요한 주장을 했습니다. 트라우마는 언어로 처리되는 서술 기억이 아니라, 감각과 운동의 형태로 몸 자체에 저장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희미해지지 않고, 의지로도 통제가 안 됩니다.
뇌 영상 연구에서도 이것은 확인됩니다. 트라우마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 공포를 처리하는 편도체(amygdala)는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여기서 편도체란 뇌의 측두엽 안쪽에 위치한 작은 구조물로, 위협 자극을 감지하고 공포 반응을 촉발하는 역할을 합니다. 반면 "지금은 안전하다"고 판단하는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은 활동이 급격히 줄어듭니다. 머리로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몸이 안 따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뇌 회로 구조의 문제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들을 45년간 추적한 연구에서도 이 점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즉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가 없는 참전자들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흐릿해졌습니다. PTSD란 압도적인 외상 사건 이후 그 기억이 반복적으로 침투하고 자율신경계가 만성적으로 활성화된 상태를 말합니다. 반면 PTSD가 있는 참전자들은 45년이 지나도 기억이 첫날처럼 선명하게 살아 있었습니다(출처: 하버드 의과대학).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기억은 오래될수록 흐릿해진다고 당연하게 생각해왔는데, 트라우마 기억은 오히려 시간이 지나도 재생 품질이 그대로라는 게 섬뜩하게 느껴졌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꽤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요즘 신경 쓸 일이 많았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 시기에 유독 잠을 자면서도 긴장이 풀리지 않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다가 꾼 꿈이 그걸 압축해서 보여줬던 것 같습니다. 몸은 제가 의식적으로 "이제 쉰다"고 결정하기 전부터 이미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자율신경계(autonomic nervous system)입니다. 자율신경계란 심장 박동, 호흡, 소화, 혈압 등 의지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신체 기능을 조절하는 신경 체계입니다. 교감신경은 긴장과 활성화를, 부교감신경은 이완과 회복을 담당합니다. 만성 긴장 상태는 교감신경이 지속적으로 우세한 상태로, 이것이 근막 경직과 직결됩니다. 그래서 저는 운동만 열심히 하는 것이 답은 아니라고 봅니다. 교감신경을 계속 자극하는 강도 높은 운동만 반복하면 오히려 긴장이 쌓일 수 있습니다. 쉬고, 이완하고, 호흡을 정리하는 시간이 같은 비중으로 있어야 몸의 기억이 회복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몸이 두려움의 패턴을 기억할 수 있다면, 반대로 안전과 평온의 패턴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게 세포 기억 연구가 주는 희망입니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거나 "마음이 약해서 그렇다"고 자책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 꿈을 꾼 뒤로는 긴장 상태가 몸에 어떻게 쌓이는지 조금 더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뭔가 불편한 신호가 반복된다면, 그건 마음이 약한 게 아니라 몸이 먼저 알아챈 것일 수 있습니다. 그 신호에 귀 기울이는 것이 시작입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의료 조언이 아닙니다. 지속적인 통증이나 심리적 어려움이 있다면 전문가 상담을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dmylr4m3dGc&list=PLx4FPnDh-D0Mz0TWo5mQIrvHVQRZrQawy&index=10